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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그럴 줄 아셨음에도 주신, 선악과

선악과 이야기는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왜 굳이 아담이 잘 볼 수 있는 동산 가운데에 만드신 걸까?'
'아니,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할 걸 알고 계셨잖아?'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선악과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이 악한 분이라거나
매정하신 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면 분명 잘못 이해한 것이겠죠.

그렇기에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괴롭히려고 선악과를 주신 것이 아니며,
죄를 지으라고 주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선악과를 주셨습니다.
먼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부터 알아봐야겠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많이들 오해하는 것처럼 먹으면 어떤 특별한 지식을 갖게 되는 나무가 아닙니다. 마법에 걸려서 먹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망가지게 되는 신비한 나무가 아니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태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


따라서 선악과를 먹는 다는 것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내가 결정하겠다는 행위'를 상징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로 올리게 되는 행위이죠.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는 나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말라"라고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던 선악과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동산의 중앙에 있었습니다. 아마 아담은 동산 어디를 거닐든 이 두 나무를 자주 마주쳤겠죠. 그럴 때마다 아담은 생명나무를 보며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했을 것이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며 동산을 다스리는 자신의 권한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즉, 아담은 언제든지 그 나무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진정한 주인이심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이 두 나무는 하나님이 주신 중요한 예배의 수단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 두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셨던 하나님의 의도는 창조물로써의 아담 자신이 기억해야 하는 제한을 자기 마음의 주변부가 아닌 중심에 가져야 한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제약을 주심으로써 그를 노예처럼 만들기 위해 선악과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나무를 통해 하나님을 떠올리며 사랑이 넘치는 주인과의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주신 이유는 아담을 사랑해서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담의 타락을 의도하고 계획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의문점, 그리고 관점의 전환


(물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던 계획이지만) 하나님이 의도한 계획이 아니었다면, 아담의 타락을 미리 막아 주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물론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셨다면 아담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로봇과 같은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할 줄 미리 아셨음에도 로봇이 아닌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고 온전하니 아담도 거룩하고 온전해지길 원하셨습니다. 죄에서 자유로워지라고 당신을 닮은 인격성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그 자유의지를 죄에 묶이는 일에 사용한 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 거꾸로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선악과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선악과에 담겨 있는 의미와 의도를 살펴본다면
더욱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선악과는 단 하나의 작은 금지 명령입니다.
하나님은동산 전체를 다스리고 지배할 권한을 포함한 모든 것을 아담에게 주셨죠.

때론 우리의 시선을 돌려 단 하나의 금지명령보다
하나님이 주신 그 외의 모든 것에도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