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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답이 되는 기독교

:::답이 되는 기독교:::
MAKING SENSE OF GOD

 

 

I.     목적
-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막연한 믿음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전환하기 위함.

 

 

 

II.    요약

1.    세속주의의 기초는 이성증거?(47)
- 기독교에서 세속주의로 역회심한 사례를 S.A. 조이스의 이야기를 통해 소개한다.(47-48) 조이스의 이야기는 역회심의 전형적인 레퍼토리를 따른다. , 신앙인은 맹신하면서 살지만, 세속적인 사람이 신을 믿지 않는 건 명확한 증거와 이성을 따른 결과라는 주장이다. 이를 주된 이유로 세속적인 사람들은 기독교 신자의 주장을 탐색하고 검토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종교에서 세속주의로 옮겨 가는 일은 신앙을 버린다기보다 새로운 신념 체계와 새로운 신앙 공동체로 갈아타는 것이다.

 

i. 입증 가능한 것만 믿어야 한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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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세속적인 사람들이 취하는 첫째 신념은 배타적 합리성이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킹던 클리퍼드는 배타적 합리성을 이렇게 정리했다. “무엇이든지 증거가 불충분한 채로 믿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오류다.” 클리퍼드의 논제에 따르면 경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한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명제의 경험적 증거는 무엇인가?
  
또 다른 문제점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물리적, 화학적인 현상이야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정의와 인권을 믿는 것, 모든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평등하다는 사실, 인간의 선행과 악행의 기준 따위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이런데도 입증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종교적 신념을 품어서는 안 된다거나 그것을 진리로 알 수 없다는 말이 합당한가? 많은 사람이 증거가 없어 신을 못 믿겠다고 말하거니와, 그 동일한 기준을 다른 신념에 적용한다면 그 누구도 무엇 하나 옹호할 수 없다.

 

ii. 이성과 믿음은 협력 관계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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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불합리성이나 감정과 충동에만 근거한 신념을 지지해서는 안된다. 모든 논제와 명제는 합리적 시험을 거쳐 내적 일관성을 확보해야 하고, 이미 알려진 실재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 기독교 신자도 이성과 믿음을 통해 자신의 신념에 도달하고 세속적인 사람들도 이성과 믿음으로 자기 신념에 도달한다. 둘 다 자연과 인생의 동일한 실재를 본다. 둘 다 합리적, 직관적, 사회적 과정을 통해 그 실재를 가장 잘 해석할 길을 찾는다. 이성은 단독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iii. 양쪽 다 명백히 증명할 수는 없다(79)
- 경험적 이성으로는 초자연적 실재가 있다는 주장도 증명할 수 없고 초월적 실재가 없다는 주장도 증명할 수 없다. 물론 그런 철학적 또는 종교적 주장을 비교하고 평가할 방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여지없는 실증 가능한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 406제에 이렇게 요약했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할 우리의 무능력은 그 어떤 독단론으로도 당해 낼 수 없고, 반대로 우리가 품고 있는 진리의 개념은 그 어떤 회의론으로도 당해 낼 수가 없다.”

 

 

2.    의미는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84)
- ‘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답하지만 세속적인 사람들은 질문이 잘못됐다고 답한다. 그들에게 의미란 한 순간 대상을 향해 느끼는 인간의 기분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특정한 대상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는 각자 정할 수 있어도, 삶 자체의 의미를 물을 순 없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삶의 의미란 아예 없으며 이 사실이 표면상 거슬리거나 두렵기까지 할 수 있으나 결국은 해방을 가져다준다. ······해답은 우리 스스로 궁리해야 한다.”라고 했다. 인생에서 의미가 심리적으로 필요하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세속적인 사람들은 의미를 스스로 지어내라고한다.

 

i. 각자 삶의 의미를 지어내라?(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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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인 사람들에 의하면 우주에는 목적이 없기에 우리 각자는 자유롭게 의미를 지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 ‘삶이란 내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관점인데, 꽤 자아도취적인 관점이고 실제로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를 들어 사력을 다해 호랑이를 얌전하고 푸근한 동물이라고 해석해보라. 실제로 그것을 시도하다가는 살아남지 못한다. 세상은 우리 해석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문제도 있다. 지어내는 의미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의 느낌에 의존한다. 물론 정치를 변화시킨다거나 행복한 가정을 일구기 위해 살겠다는 결심은 삶에 원동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지어내는 의미는 발견하는 의미보다 훨씬 깨지기 쉽고 내실이 없다. , 덜 이상적이고 덜 공동체적이며 덜 영속적이다.

 

ii. 지어내는 의미는 덜 이성적이다.(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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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네이글이 부조리라는 글에서 말하기를, 직업과 돈벌이 등 어떤 활동이 의미 있으려면 이 모두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동일한 물음이 계속 꼬리를 문다는 것이다. 되묻는 사슬의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답을 찾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신이 없고 물질세계 너머의 삶도 없는, 이생이 전부인 관점에서는 내가 집단학살을 일삼는 범죄자든 아프리카의 기아를 퇴치하는 선인이든 결국 상관이 없다. 내가 살아있는 잠시 동안에는 일부 사람을 더 기쁘거나 슬프게는 할 수 있지만 그 너머로 (시간적, 의미적)범위를 조금만 더 넓혀도 당신의 좋고 나쁜 영향력은 있으나 마나다. 영영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무슨 일을 하든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영원한 의미란 없다.
 
이때문인지 포스트모던 문화의 많은 사람은 삶의 의미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하지 않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고 믿는다. , 우리는 세속적 관점대로라면 완전히 무()인 자신의 모든 활동의 궁극적 결과를 생각하지 않도록 스스로 단련해야 한다. 대법원 판사였던 올리버 홈즈 주니어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냉철하게 생각한다면 현대인은 인간이 결국 원숭이나 모래알의 의미와 다를 이유가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 말인즉, 현대 세속주의자들이 삶 전체를 유물론적인 세계관으로 대하는 만큼 인간의 중요성은 전무하다는 뜻이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아래층으로 내려가 홀로 카드놀이를 해야한다고 했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 신자에게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정반대로 전개된다. 기독교인은 스스로에게 우주에 대한 네 믿음 속에 함축된 의미를 그만 생각하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복음을 통해서 평안과 삶의 의미를 누리게 한다. 이 신념을 최대한 인식하고 되새길수록 의미는 더 깊어지게 된다. 이런 부분에서 지어내는 의미발견하는 의미를 품고 살아갈 때보다 덜 이성적인 방식이다.

 

iii. 지어내는 의미는 덜 공동체적이다.(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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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조사이어 로이스는 충성심의 철학에서 인간에게 의미가 필요한 이유를 탐색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개인의 이해관계보다 더 중요한 대의에 헌신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우리 삶의 의미를 각자의 행복보다 중시할 때에만 행복하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공동체적인 의미가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한다는 뜻이다.
 
지난 한 세기동안 지어내는 의미는 개인주의를 낳았다. 개인주의가 삶이 각자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주장과 만나면 다음과 같은 현대의 문화가 형성된다. “누구나 각자의 삶을 개발할 권리가 있고, 그 근거는 무엇이 정말 중요하거나 가치 있는가에 대한 각자의 생각에 있다. ······다른 어느 누구도 그 내용을 지시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이 결과 우리는 빈민을 굶어 죽게 방치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믿을 수 있지만, 그게 왜 잘못인지 이유를 댈 수 없다. 당신은 빈민을 돋는 것이 삶의 의미일 수 있지만 내게는 빈민을 밟고라도 부자가 되는 게 삶의 의미일 수 있다.
 
이처럼 사람마다 각자의 의미를 지어내면 결코 공동체적인 세계를 이룰 수 없다.

 

iv. 지어내는 의미는 덜 영속적이다.(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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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모든 종교와 문화는 고난과 죽음에서도 이생 너머의 더 중요한 무엇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속적인 사람이 지어내는 의미는 물질세계 내의 무언가에 중심을 두어야만 한다. 따라서 삶이 의미 있으려면 순탄해야만 한다. 세속주의 식으로 의미에 접근하면, 당신은 세상살이의 현실 앞에서 극도로 취약해질 수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왜 어떤 사람은 끔찍한 상황에서도 힘과 덕을 잃지 않은 데 반해 다른 사람들은 그냥 포기했거나 심지어 살아남고자 부역자가 됐는지를 탐색했다. 많은 사람들은 승진이나 사회적 지위나 가정을 의미로 삼았다. 그런데 이런 의미는 이생에 근거했기에 죽음의 수용소에서 완전히 쓸려 나갔다. 반면 무너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생의 상황을 초월하는 다른 기준점이 있었다.
 
지어내는 의미는 고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져버린다.

 

 

3.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면, ‘누리는 즐거움이 더 커진다.(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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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연구결과에 따르면 부와 만족의 상관관계는 매우 낮으며, 사회가 번영할수록 우울증도 그만큼 흔해진다. 인간은 이러저러한 것이 성취와 만족을 가져다주리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i. 고질적인 불만족의 원인(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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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우리 선조는 목표 달성 후의 실망을 경험하고는 더 높은 목표를 달성하고자 더 열심히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수명도 길어지고 자녀도 많이 두어 그 유전자를 우리에게 물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무엇도 가장 깊은 갈망을 채워 주지 못한다는 불만족은 실제로 선조들의 생존을 도운 뇌의 화학반응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목표 달성 후의 실망이 더 높은 목표를 향한 동기를 주는가? 물론 실망 때문에 단기적으로 더 성취에 매진하는 사람도 있으나, 실망은 대개 동기와 의욕을 앗아간다. 실망은 대부분의 경우 생존을 위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끊임없는 불만족에 대한 진화론의 설명은 성립되지 않아 보인다.
 
기독교 철학자 어거스틴은 불만족의 직접 원인은 우리 사랑의 순서가 어긋난데에 있다고 봤다. 우리의 삶이 불행하고 무질서한 것은 사랑의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을 사랑한다든지, 마땅히 사랑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든지, 덜 사랑해야 할 것을 너무 많이 사랑한다든지, 혹은 그 반대이든지.. 정의롭고 선한 사람(만족하는 사람)은 사랑에 질서가 잡혀있다고 말한다.

 

ii. 영원을 향한 갈망 때문에(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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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궁극적 무질서와 불만족의 근본적 원인은 가장 중요한 대상을 첫째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은 주님을 찬양함이 인간의 즐거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우리 마음은 평안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지어진 존재이므로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을 줄 수 없다.
 
피조물이 어떤 갈망을 안고 태어났다면 이를 충족시킬 길도 반드시 존재합니다. 아기가 배고픔을 느낌은 음식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오리가 헤엄치고 싶어 함은 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사람이 성욕을 느낌은 섹스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이 세상의 어떤 경험으로도 충족시킬 수 없는 갈망이 있다면, 가장 개연성 있는 설명은 내가 다른 세상을 위해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iii.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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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가정이나 일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에 비해 하나님을 너무 적게 사랑하는 데 있다. 만족을 주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 것에 마음을 최고로 쏟지 말아야 한다. 대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불어넣고, 나도 그분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강한 신자도 하나님을 완전하게 사랑하지는 못한다. 그 근처에도 못 간다. 그러나 최대한 그분을 최고로 사랑하는 만큼, 모든 게 점차 질서를 되찾아 삶의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만족의 가장 깊은 근원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것 자체로 누릴 수 있다.’

 

iv. 예수님의 사랑의 실화에 붙들릴 때(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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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막연하고 추상적인 사랑의 신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예수님을 통해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이해하고 그 실화에 붙들려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하나님께 버림받아 죽으신 것은 역사이자 현실이다. 불과 2000년 전, 비행기로 하루도 걸리지 않은 곳에서 예수님은 우릴 위해 대신 버림받으셨다.

 

 

4.    제약을 제대로 선택하는 것이 진짜 자유.(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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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문화는 어쩌다 자유를 최고의 선으로 떠받들게 됐을까? 16-17세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싸움이 지속되면서 유럽의 엘리트층은 종교에 신물을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의 새로운 기초를 만들었다. 그들이 바라던 것은 시민은 기독교인이되 정부 법은 기독교의 어느 한 교회나 정통에 구속받지 않는 상태였다. 이런 개념의 사회에서 필요한 윤리란 오직 자유와 상호 유익의 윤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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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에는 독일의 파시즘과 러시아의 공산주의에서 전례 없는 전체주의와 학살을 낳았고 이에 좌우익을 떠나 각자의 정치 체제가 사회 문제와 인간의 고난을 개선해 줄 것으로 생각했던 사상가들은 아연실색했다. 그리하여 많은 철학가와 사상가가 자유를 최고의 고무적인 이상이자 모든 문화 기구를 심판할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다.

 

i. 기독교는 정녕 자유의 적인가(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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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자유는 양자택일의 문제일까? 그렇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니다. “내 주인은 누구도 아니고 나예요라는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개인의 자유라는 이상은 서구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사회가 소수집단과 여성에게 훨씬 더 정의롭고 공정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틀렸다. 이제 자유는 아무런 규제나 제약이 없는 상태로 정의된다. 이 정의대로라면 선택과 행동에 제한이 없을수록 더 자유롭게 느껴진다. 단언컨데 이런 식의 주장은 틀렸다.

 

ii. 원하는 바가 서로 충돌할 때(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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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나는 자유롭다. 그러나 이렇게 무제한 선택권으로 정의되는 자유는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높은 연봉이라는 자유를 원한다면 최고의 교육을 받느라 돈과 시간의 자유를 희생해야 한다. 이렇듯 진짜 자유란 제약이 없는 게 아니라, 제약과 잃어야 할 자유를 제대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반응할 수 있다. ‘그 제약조차도 내가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정의대로 나는 여전히 자유롭다. 내 마음대로 하는 한 자유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깊게 생각해보면 삶에서 선택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정말 당신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한계는 당신의 갈망이나 선택과 무관하게 실존한다.
 
최고의 자유란 제약과 잃어야 할 자유를 제대로 선택하는 것이다.

 

iii. 모든 사람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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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개념의 자유는 불공정하다. 타인에게 진 빚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당신을 위해 희생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가? 정말로 당신은 당신만 책임지면 되는가? 아니다. 당신은 가정과 공동체의 산물이다. 그들이 당신에게 시간과 수고와 사랑을 엄청나게 많이 쏟아부었다.
  
누구 하나라도 죽으면 우리도 그만큼 축소된다. 우리가 가정과 공동체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iv. 해악이 무엇인지 합의가 어렵다(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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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누구나 마음대로 살아갈 자유가 있어야 한다.” 이는 현대 문화의 지배적인 관점이다. 이게 성립되려면 해악이 무엇인지 다들 합의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선하고 건강한 삶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다면, 사람에게 해로운 게 무엇인지 어떻게 아는가? 좌와 우로 나뉘는 정치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v. 자유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될 때(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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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최고 가치나 유일한 가치가 될 수 없다. 선택하는 자유를 활용해 뭔가를 해야 한다. 그런데 현대 서구 문화는 자유의 목적이 무엇이고 착륙 지점이 어디인지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하고 말하면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할까 봐 두려워서다.
 
자유가 선이 되려면 그 자유로 우리가 실제로 선을 행할 수 있어야만 한다. 긍정적인 일에 헌신해서 자신의 부정적 자유를 줄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는 온전한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그 자체만으로 완전하지 못하다.

 

vi. 내가 보지 못하는 내 안의 노예(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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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뭔가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며, 무엇이든 그것이 최고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당신은 직업, 정치적 대의, 특정한 친구와 동료, 가정 등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 의미와 만족의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그것이 당신을 통제한다. 당신은 결코 자신의 주인이 아니며, 자유롭지도 못하다.
 
당신은 이렇게 항변할지 모른다. “아니요! 내가 무엇에도 마음을 다 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자유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관계, 어떤 일에도 연연하지 않습니다. 무엇에도 내 만족과 의미를 다 투자하지 않아요. 짐이 가벼워 수시로 훌쩍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당신은 뭔가에 온전히 헌신되어 있다. 바로 당신의 독립이다. 당신은 거기에 지배당하는 노예다. 그것 때문에 무엇에도 헌신하지 않아 무척 외로울 테니 말이다.
 
인간은 아무도 자유롭지 못하다. 누구나 삶에 사랑과 의미와 만족이 필요하다. 누구나 무언가를 숭배하고 무언가의 지배를 받으며 산다.

 

vii. 의무가 즐거움으로 변하다(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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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주인(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우리를 인정하고 아끼고 세워 주고 존중하며, 어떤 주인이 우리를 착취하고 학대할 것인지 잘 알고 선택해야 한다. , 우리의 본성과 사양(仕樣)에 꼭 맞는 제약, 해방을 가져다주는 올바른 제약을 찾아야 한다.
 
외적인 성공을 만족의 주된 출처로 삼으면 그것이 주인으로 변해서 우리를 노예로 부린다. 더 많은 성공을 요구하고, 실패하면 스스로 책망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와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를 우리 만족의 주된 출처로 삼으면 어떻게 될까? 직업은 아무리 섬겨도, 직업은 결코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했을 때 그것은 자기혐오로 바뀌어 우리를 죽이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런 제약도 가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경우든 각 주인은 제약을 가한다. 그렇다면 어떤 제약이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주는지 어떻게 아는가? 기독교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구원하신 분을 위해 산다면, 당연히 그분의 제약은 자유를 줄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한없는 대가를 치르셨고, 우리를 가장 잘되게 하려고 영광을 버리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이 사실을 깨달은 기독교인은 그분을 알아가고, 닮아가고, 기쁘시게 하고 싶어진다. 우리에게 가해진 제약이 즐거움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그런 것이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1:25),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1-32)

 

viii.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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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28-30)
  
이런 말씀이나 같다. ‘내가 네게 명하는 일은 네가 본래 행하도록 창조된 일뿐이다. 그래서 알고 보면 내 멍에는 쉽다. 나를 따르는 짐을 네게 지운다만 내가 이미 대가를 치렀으니 너는 실패해도 용서받는다. 내가 네게서 남들에게 있는 짐을 벗겼다. 네 수고와 노력으로 스스로 구원을 얻어 내야 할 짐을 벗겼다. 과거의 실패에 대한 죄책감이나 수치심의 짐도 벗겼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입증해야 할 짐도 벗겼다. 그러므로 나를 만나면 만족을 얻고, 나를 실망시켜도 용서받는다. 그런 주인과 상전은 나뿐이다.’

 

 

5.    나만 나를 사랑하면 그만이다?(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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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문화에서는 내면의 갈망뿐 아니라 외부의 사회적 역할 및 관계가 자아를 규정하고 형성했다. 오늘날의 비서구 문화도 마찬가지다. 전통문화에 속한 사람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십중팔구 누군가의 아들, 어머니, 특정 부족과 민족의 일원이라는 답이 나온다. 온 가족과 공동체와 신의 유익을 위해 개인의 갈망을 포기하고 본분을 다할 때, 그들은 명예로운 인간으로서 정체성이 확고해진다.
 
현대 서구의 정체성 형성은 이와 정반대다. 연대 세속주의는 내면을 들여다봐야만 자아를 개발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가정과 종교 공동체와 모든 외부 요건을 떠나 초연해야만,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화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남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라.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 있으니 스스로 인정하면 된다.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돼라.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이것이 현대 서구 개인주의의 핵심이다.

 

i. 주어진 사회적 신분에 갇혀 살던 과거(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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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식 정체 형성의 문제점을 논하기 앞서 중대한 긍정적 측면부터 인정해야 한다. 과거에는 사회 내의 역할이 곧 개인의 정체성이었기에, 그 이유만으로 농부는 영원히 가난해야 했다. 이런 착취적 사회 계층은 전통적 정체성에서는 각자가 속한 계급, 그게 곧 그 사람이었다. 인생의 사명은 분수를 알고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는 성경적인 정체성 형성이 아니다. 기독교 교회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빈민을 위한 정의는 중요하며, 부자와 권력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가르친다.

 

ii. 혼자서는 나를 제대로 알 수 없다(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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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방법만 달랐다 뿐이지 현대 서구 문화의 정체성 형성도 그 못지않게 사람을 짓누른다. 현대 서구 문화는 당신의 가장 깊은 갈망과 꿈을 발견하고 표현하려면 내면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스스로 해야 한다. 외부의 누군가가 인정해주길 기대해서는 안 된다. ,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괴물로 생각해도 상관없다. 나만 자신을 사랑하면 그만이다.”이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스스로 인정해서 정체성을 얻을 수는 없다. 정체성이란 상당 부분 타인에게서 와야 한다. 정말로 당신은 그 누구의 인정도 받지 않고 스스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가?
  사고실험을
하나 해보자. 중세 바이킹 전사를 상상해보라. 그가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보니 내면의 두 가지 충동과 감정이 보인다. 하나는 공격성이다. 남에게 멸시당할 때마다 폭력으로 상대를 해치거나 죽이고 싶은 게 그의 본능적 반응이다. 체면과 명예와 전사의 도리를 중시하는 문화를 살다 보니 그는 이 감정에 쉽게 동화된다. 그게 전혀 꺼림칙하지 않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 보이는 다른 충동이 동성애 성향이라 하자. 그는 그게 없기를 바란다. 그 감정을 보며 이건 내가 아니다. 제어하고 억압하자라고 말한다.
 
이번에는 오늘날로 넘어와, 네덜란드의 한 청년을 상상해보라. 그의 내면에도 동일한 두 가지 충동이 똑 같은 강도로 존재한다. 그는 자신에게 뭐라고 말할까? 공격성을 보면서는 이건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치료나 분노 관리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동성애 성욕을 보면서는 이게 내 정체성이다. 이게 나다라고 결론짓는다.
 
이 예화로,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 사람들이 공감하는 관점과 평가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자기 속에 보이는 모습 중 일부는 중시하고 일부는 버린다. 결국 현대인도 자기다워질 자유가 없기는 고대인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스스로 복을 받을 수 없기에 누군가 우리에게 복을 줘야 한다.

 

iii. 실력주의와 불안에 짓눌리다(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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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역할에서 자존감을 더 찾던 옛날에는 경쟁적 성취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개천에서 용 나는 일도 좋았지만, 그런 일은 드물었고, 꼭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좋은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이 되어 맡은 일과 본분에 성실하고 부지런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실력주의를 믿는다. 누구든 가난한 사람은 야망과 재주가 부족해서다. 성실하기만 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이제 수치다.
  
이렇게 행위와 성취에 근거해 스스로 정체성을 지어내면, 우리의 자존감은 실패와 역경 앞에 훨씬 쉽게 무너진다. 말로는 자유로워졌다지만, 이제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성취의 장에서 인정받으려 한다. 당신은 똑똑해야 한다. 예뻐야 한다. 세련돼야 한다. 실적을 보여야 한다.
 
이런 서구적 관점의 정체성 형성은 개인에게나 사회 전반에나 버거운 짐이다.

 

 

6.    십자가에서 겸손자신감이 함께 자라는 정체성을 받았다(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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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 자아는 인간을 짓누른다. 성공이나 성취 또는 사랑의 인간관계에 기초를 두어야 하는데, 그중 하나라도 위협받거나 잃으면 자기 정체성마저 잃는다. 전통적 자아는 숨이 막히며, 가정과 부족이 말하는 의무에 예속되어 있다. 거기에 종교와 도덕적 구속까지 더해지면 문제가 더 악화될 뿐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키에르케고르는 자아를 얻는 방법의 기초가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개인이나 공동체의 갈망도 아니며 바로 하나님이라고 봤다. 우리는 외부에서 인정을 받아 정체성을 갖는다. 하지만 누가 그 인정의 궁극적 근원이 될 것인가? 부모에게 의지하는 경우, 당신이 부모를 실망시켜 거부당하면 어찌할 것인가? 실망시키지 않는다 해도 부모는 언젠가 세상을 떠난다. 사랑의 상대나 배우자, 자녀 등 인간은 다 마찬가지다. 직업적 호평이나 성취에 의존하는 경우, 실패하거나 호평을 얻지 못하면 당신은 위태로워진다.
 
당신이 중시하는 누군가가 당신을 중요하게 대해 줘야 한다. 당신이 칭찬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 당신을 칭찬하고 사랑해줘야 한다. 인간은 이 대상에서 제외돼야 한다. 흠 많고 변덕스러울 뿐만 아니라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불변하는 존재의 사랑만이 평정을 가져다줄 수 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이 대상에 적합하다.
  
성경에도 그 대안이 잘 나와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i. 정체성은 성취하는 게 아니라 받는 것(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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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신다라고 말하면서 불안해한 게 아니라 담대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전통 문화나 세속적 문화와 달리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성취하는 게 아니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받아 입양해 주시고 우리와 연합해 달라고 구할 때, 그 근거는 우리 행위와 도덕적 노력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께 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선물로 받는다.
 
우리가 가장 중시하는 분이 우리를 중시하신다. 우주에서 최고로 중요한 견해인 하나님의 견해가 우리를 귀하다고 하신다. 이것이 사실임은 거룩하시고 가장 뛰어난 명예와 이름과 가장 고결한 정체성을 지니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불후의 이름과 영원한 정체성을 주시려고 친히 영광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치욕스럽게 죽으셨기 때문이다.(2:1-11 참조) 우리를 그렇게까지 귀히 여기셨다.

 

ii. 감사와 기쁨이 이끄는 삶(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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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나를 무조건 받아주신다. 그래서 나는 도덕적이고 선하게 살아간다.’ 기독교인의 고백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건 억지로 사랑을 받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것도 자아를 얻고 자존감을 성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공익에 일조하기 위해서다. 여전히 가정, 국적, 일 등은 우리 정체성의 일부이지만. 자아와 가치의 궁극적 출처가 아니기에 우리의 정체성에 흠을 낼 수 없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또 하나의 좋은 선물이요 남을 섬기는 도구일 뿐이다.

 

iii. 하나님 앞에서의 당신이 진짜 당신이다(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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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부분은 진짜 나이고, 그분이 금하시는 부분은 외부에서 침투한 죄라는 이물질이다.(7:14-25 참조) 후자는 성령이 빚고 계신 본연의 내가 아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6-17). 이 새로운 정체성보다 귀한 것은 없다.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참자아를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무엇을 주고 그 자아를 다시 사겠느냐”(8:36-37)라고 말씀하셨다.
 
완전한 정체성과 확신을 얻으려면 자신을 낮추고 자결권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니라”(10:39) , 자신을 찾고 섬기려던 노력을 그만두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힘써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면, 그때 비로소 자아를 찾게 된다.

 

iv. 차이에 마음을 여는 새로운 방식(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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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고 어떤 식으로든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높이려 한다. 타자를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위장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가 없다. 우리가 타인을 배제하거나 (부정적인 영역에)종속시키지 않고 용서하고 포용하려면 새로운 방식의 자아상이 필요하다.
 
가해자를 용서하고 나와는 딴판인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려면 두 가지가 조합을 이뤄야 한다. 먼저 타인보다 자신을 우월하게 여길 수 없는 철저한 겸손이 필요하다. 자신을 질적으로 더 낫게 여겨서는 안 된다. 동시에 정서 불안이 없어야 한다. 정서가 불안하면 상대를 흠잡아 악으로 내몰고 본인의 자의식을 내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정체성에서는 그 둘이 상호 배타적이다. 하나가 뛰어나면 다른 하나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마음속에 그런 자신감과 겸손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이렇게 답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오래 있으면 ······ 적을 괴물 인간의 영역에서 보편 인간의 영역으로 옮겨 놓고, 자신은 교만한 무죄의 영역에서 동일한 죄성의 영역으로 옮겨 갈 수밖에 없다.”
 
기독교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 , 하나님 아버지가 보시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의롭지만, 동시에 그 자신은 아주 흠 많은 죄인이다. 그래서 안정과 겸손이 그 안에서 함께 있을 수 있다. 자신을 대적하는 무리를 위해 죽어 가면서도 복수하기보다 그들이 용서받기를 위해 기도하신 분, 그분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십자가가 보여주는 하나님은 십자가가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정의를 사수하시는 분이다. 죄와 악은 간과될 수 없고 심판받아 죽어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가 보여 주는 하나님은 사랑이 지극해서 기꺼이 그 대가를 친히 치르고 심판을 당하신다. 그분은 진리와 사랑 중 하나를 택하지 않고 둘 다 취하신다. 이는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적 사랑과 용서의 모범이다.

 

v.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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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1-13)
  예수님은 다음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
 
내 정체성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가 해 주신 일과 내가 그분 안에서 은혜로 영원한 이름을 얻었다는 사실에 둔다면, 나는 한편으로 누구에게도 우월감을 품을 수 없고 또 한편으로 어느 누구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7.    선을 추구한다면, 이미 신을 믿고 있는 것이다(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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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세속주의가 좀처럼 정립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바로 도덕적 나침반의 문제다. 재회심한 A. N. 윌슨의 기사에 따르면 그가 신을 불신하는 데서 벗어나게 한 마지막 증거 중 하나는 이렇다. “바그너 일가와 나치 독일에 대한 책을 쓰다가 히틀러의 신다윈주의 광란이 철저하게 모순임을 깨달았다. 반면에 그를 배격하는 논리는 아주 탄탄했는데 대부분이 기독교인에게서 나왔다. 그런데 그들에게 돌아온 대가는 지성의 완승이 아니라 피 흘림이었다. 본회퍼 목사의 책 윤리학을 읽어보라. 그러면서 윤리를 순전히 인간이 만들어 낸 구성물로 여기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미친 세상을 만들어 냈는지 자문해 보라.”

 

i. 신이 없다면 도덕적 의무가 있을 수 없다(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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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르 도스토예프스키도 이렇게 이야기했다. “신과 내세가 없다면 ······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 사람이 못할 일이 없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 사람보다 덜 착하고 덜 도덕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현실을 보면 신앙이 없이도 도덕적인 사람이 있는 반면, 신앙이 있어도 부도덕한 사람이 있다. 현실에서 보나 기독교 교리로 보나 신앙과 도덕성에는 상관성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신이 없다면 도덕적 의무가 없으므로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라고, 즉 허용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나는 이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행동하겠다.” 이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때 내면의 느낌이 바로 도덕의 근원이다. 그러나 세속적 현실관대로라면 누구도 남에게 당신의 느낌과는 무관하게 당신의 그 행동은 옳다
(또는 틀렸다)라고 말할 수 없다. 남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도덕의 근원이 내면이 아닌 우리 바깥에 있어 우리가 그것을 존중해야만 한다. 전지전능하고 무한히 선한 신이 존재한다면, 신 자신이나 신의 법이 그런 도덕의 근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도덕의 근원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ii. 정신분열증에 걸린 현대 도덕(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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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서구 사회는 역사상 가장 도덕적인 문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평등이라는 이념을 지키려고 날로 더 넓은 계층의 사람을 포용해야 하고, 날로 더 많은 부류의 간극을 이어 주며, 우리 삶에 날로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평등과 권리를 수호해야 하는가? 왜 희생하며 빈민을 도와야 하는가? 이 질문에 오늘날의 문화 관련 제도와 기관들은 아무런 답도 내놓을 수 없다.
 
이제 모든 도덕은 각자 선택하거나 동일 문화권의 집단(각자가 소속된 공동체)이 선택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 두 경우 모두 객관적으로 발견하고 수용해야 할 도덕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의미의 입법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현상은 일종의 지적 정신분열증을 낳았다. 토론토대학교 마리 루티 교수는 이렇게 썼다. “내가 믿기로 가치란 신이 내린 게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이다. ······ 그럼에도 나는 성차별이 인종차별보다 조금이라도 더 옹호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성차별을 불의로 보지 않고 특정 문화의 관습으로 일축하려는 집요한 시도는 잘못이다.” 이에 누군가 반론한다. “그렇다면 성 평등도 문화적으로 구성된 서구의 관습에 불과하므로, 이를 촉구하는 당신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다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반박한다. 성 평등은 어느 문화에서나 존중받아야 할 보편 도덕규범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상 이런 것이다. “당신의 도덕 가치는 사회적 구성물일 뿐이지만 내 도덕 가치는 그렇지 않으므로 만인에게 참이다.” 이처럼 스스로 정당화하는 자기모순의 태도가 오늘날 세속적 문화에 만연해 있다.

 

iii. 우리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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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의 철학자 엘리자베스 앤스컴은 현대 도덕 철학이라는 아주 영향력 있는 논문을 썼다. 그녀에 따르면 과거에는 도덕을 진술할 때 필요한 당위의 근거를 신의 뜻이나 우주 질서에 두었다. 하지만 이제는 당위를 정당화할 길이 더는 없으므로 현대인은 당위라는 단어를 아예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앤스컴의 저작물을 토대로 철학자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우리를 이 자리에 이르게 한 역사적 과정을 짚어 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와 중세 기독교 사상가는 도덕이 인간은 어떤 목표점으로 인도한다고 봤다. 이것은 목적의 개념이다.
 
인간의 목적에 대해 답하려면 신이나 신적 계시나 영적 우주 질서에 대한 신념이 필요했다. 과학이나 이성만으로는 이를 확인할 수 없었기에 근대 사상가는 인류의 목적을 다룬 개념을 모두 배재한 채로 도덕과 윤리 규정의 기초를 정하려 했다. , 칸트, 키에르케고르는 객관적 도덕 주장을 옹호하려 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사회는 도덕 담론에서 양극화되어 있으며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조금도 설복시키지 못한다.
 
매킨타이어에 의하면 뭔가를 도덕적으로 판단하려면 그 대상의 주어진 목적을 살펴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시계를 예로 들어보자. “시계가 부정확해서 시간이 들쭉날쭉하다라는 불평이 나온다면 이 시계는 나쁘다라는 결론이 정당하다. 그러나 시계를 고양이에게 던져 잘 명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시계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런가? 우리는 시계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목적을 알아야만 선과 악을 가릴 수 있다. 인생의 목적에 대한 답이 없다면, 인간의 행동이 선한지 악한지 결코 판정할 수 없다. 이것이 세속적 관점의 도덕 문제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의 목적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특정 행동이 ‘선하다’ 거나 악하다는 말은 다 주관적이며 결코 사실 진술이 아니다.

 

iv. 옳고 그름도, 선악도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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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L. 맥키는 윤리학 : 옳고 그름의 탐구에서 도덕의 객관적 사실은 과학으로 그 존재가 입증될 수 없기에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도 우리가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맥키도 인정했듯이 사회가 돌아가려면 도덕이 필요하다. 또 도덕이 동기로 작용하려면 도덕의 객관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우리가 (잘못) 믿어야만 함도 인정했다. 그러면서 최종 결론은, 사람들이 최고 기량을 발휘하려면 맥키 자신이 참이라고 가르치는 바를 그들이 믿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세계관인가?

 

v.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도덕 논증(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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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조지 매브로즈는 도덕적 의무의 실재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는 못할지라도 아주 강력한 증거라고 했다. 그는 세속적 우주, 플라톤의 이데아가 존재하는 우주, 도덕적으로 선한 창조주 신이 존재하는 전통적 우주를 개괄하고 그중 어떤 우주에서 도덕적 사실이나 의무가 예상되는지 물었다. 답은 세속적 우주에서는 예상할 수 없지만 플라톤의 세계나 기독교의 세계에서는 예상 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신이 수립한 어떤 물리학 이론이 있는데, 그 이론에서 예상한 것과는 다른 현상이 관찰됐다고 하자. 이때 당신은 그 현상은 내 관심 밖이다. 그냥 내 이론을 악착같이 고수하겠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의 이론이 틀렸고 다른 이론이 실재에 더 부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연다.
  매브로즈는
만약 세속적 사상가들이 도덕적 사실과 의무를 믿는다면, 그 두 가지는 세속적 세계보다 초월적 세계에서 훨씬 더 말이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세속적 사상가들은 본인들의 세계관 이론으로는 이생의 가장 지울 수 없는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도덕을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른 세계관이 실재에 더 부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vi. 반전의 이야기(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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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진리 주장은 타인을 지배하게 될 수 있다. 본인들의 주장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인은 그럴 수 없다. 성경의 줄거리는 하나님이 피지배자, 비루한 인생, 약자, 소외층을 거듭 택하시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저 성경의 저자들이 약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모본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창시자가 아버지를 비롯해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수치스럽게 죽는 경우는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의 구원은 그분의 빈곤과 거부당함과 연약함을 통해 우리에게 온다. 기독교인은 공을 세워 구원받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과 구주의 필요성을 인정함으로써 구원받는다.

 

vii. 압제의 악순환을 끊으신 분(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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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도덕 진리를 믿으면 그 믿음이 남을 압제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절대 진리가 한 인격체이며 그분이 자신을 대적하는 무리를 위해 죽으셨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분은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용서로 갚으셨다. 이 이야기가 우리의 중심이 되기에, 우리는 권력을 장악하고 남을 지배하게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수를 자신의 구원자로 믿는다는 기독교인이  빈민과 소외층을 위한 구제와 정의의 삶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긋나는 삶이다.

 

 

 

III.  소감
- 그저 추상적으로만 믿고 있던 하나님과 예수님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준 책이다. 현대의 세속적인 관점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 가치판단, 도덕 등을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논리적으로 풀어나갔고 복음주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아주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을 거의 다 요약했을 때 즈음, 하나님을 향한 다른 관점들의 신학들을 알게 되었고 나는 복음주의에 근간을 두고 있기에 이 책이 더욱 중요하게 와닿았다. 두고두고 위에 요약한 내용들을 읽으며 복음주의 신앙인으로서 기초를 다지게 될 것 같다.